1. 개화기 도입기 - 외교사절·경성구락부·근대 스포츠 문화 유입
한국에서 테니스가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개화기였다. 19세기 말 조선에 정착한 서구 외교사절과 선교사들은 그들이 즐기던 서양식 레저 문화를 자연스럽게 조선 사회에 소개했다.
당시 서울 정동 일대의 외국인 거주 지역에는 소규모 테니스 코트가 조성되었고, 경성구락부(Seoul Club) 는 테니스라는 종목이 국내에 처음 뿌리내린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한국인은 초기에는 관람 중심이었지만, 테니스 장비·라켓·스트링·공 등을 접하며 서구식 스포츠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테니스가 조선의 상류층과 지식층을 중심으로 흡수되며 ‘근대적 운동 문화’의 일부로 편입되는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제도적 기반은 없었지만, 테니스를 통해 신문물과 새로운 신체문화가 국내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는 향후 학교·군대를 중심으로 테니스가 확산될 수 있는 결정적인 토양을 제공했다.
2. 일제강점기 기반 확립 - 학교체육 제도·정구 세력화·지역 경기 문화 형성
일제강점기는 한국 테니스가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된 시기였다.
일본식 체육 교육은 정구(소프트테니스)와 테니스를 학교 체육 프로그램에 포함시켰고, 이를 통해 조선인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라켓 스포츠를 경험하게 되었다. 여러 중등학교·전문학교는 자체적인 라켓부를 만들어 체계적 연습을 진행했고, 이는 조선인 선수층 형성으로 이어졌다.
경성전국정구대회, 청년단체 경기 등 다양한 대회가 증가하면서 지역 간 교류도 활발해졌고, 테니스는 점점 ‘특정 계층의 레저’가 아닌 ‘학생 중심 체육’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식민지 상황 속에서도 학생들의 스포츠 활동은 자발적 조직과 연습 문화를 확장시켰고, 이는 해방 이후 한국 테니스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기본 인프라로 작용했다.
3. 해방 이후 정착기 - 협회 조직화·전국체전·군·대학 팀의 성장
1945년 해방은 한국 테니스가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는 분기점이었다. 1946년 테니스는 전국체육대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며 국가 단위 경쟁 체계가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대한테니스협회(KTA)는 규정 정비, 심판 교육, 선수 선발 시스템을 갖추며 조직적 운영을 강화했다. 1950~60년대에는 군 체육부대와 대학 테니스부가 전력의 핵심 역할을 하며 선수층을 빠르게 확충했다.
이후 정부는 국제대회 참가를 지원하며 선수들이 아시아 무대에서 기량을 시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시기부터 한국 테니스는 ‘아마추어 중심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고, 전국 각지에서 테니스장이 세워지며 일반인 테니스 붐도 형성되었다.
해방 직후의 정비 작업은 선수 육성 구조, 경쟁 시스템, 심판 조직 등 한국 테니스의 골격을 완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4. 국제무대 도전기 - 데이비스컵·ATP 투어·한국 테니스의 얼굴
1970~90년대는 한국 테니스가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 도전한 시대였다. 데이비스컵 참가 경험은 한국 선수들이 세계 수준의 경기력을 체감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기술·전술적 기준도 국제 표준에 맞춰 변화했다.
이 시기에 김봉수, 윤용일 등 국제대회에서 인상적인 성과를 낸 선수들이 등장하며 한국 테니스의 국제적 존재감이 강화되었으며, 이 경험들은 후대 선수들에게 실질적인 기술·전술 모델이 되었고, 국내 대회 운영 방식도 국제 테니스 연맹(ITF) 기준에 맞춰 정비되었다.
이 시기 이후 한국 테니스 역사에서 상징적 존재인 이형택 선수가 등장했다. 이형택은 1990년대 후반~2000년대에 ATP 투어를 활발히 누비며 한국 테니스의 국제적 위치를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세계랭킹 단식 최고 36위를 기록하며 아시아 테니스의 주역으로 인정받았고, US오픈·호주오픈 등 메이저대회에서 지속적인 승리를 거두며 한국 선수가 세계 무대에서도 경쟁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또한 한국 테니스의 약점이던 ‘국제대회 경험 부족’을 자신의 활동으로 극복하며 후배들에게 세계 테니스의 현실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형택의 존재는 단순한 성적을 넘어, 테니스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프로 테니스 메커니즘’을 국내에 각인시킨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의 활약은 2010년대 이후 정현·권순우로 이어지는 한국 테니스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반이 되었다.
5. 21세기 도약기 - 정현의 돌파·권순우의 우승·국제대회 유치 확대
21세기에 들어 한국 테니스는 세계무대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연달아 생산했다. 정현의 2018 호주오픈 4강 신화는 한국 테니스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꾼 사건으로, 아시아 선수의 그랜드슬램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어 권순우의 ATP 투어 우승은 한국 테니스가 세계랭킹 상위권에서 반복적으로 경쟁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러한 성과는 국제 경험 확대, 테니스 과학기술 도입, 유소년 시스템 업그레이드 등 구조적 변화의 결과였다.
한편 한국은 ATP·WTA급 대회, 챌린저·ITF 대회 등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며 글로벌 테니스 생태계와 한층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국가대표 훈련 시스템, 피지컬 트레이닝, 데이터 기반 분석도 크게 발전해 지원 환경이 현대화되었다.
이 시대는 한국 테니스가 ‘국내 중심 종목’에서 ‘세계 투어 경쟁 종목’으로 전환된 확실한 도약기였다.
6. 미래 전망 - 유소년 육성·훈련 인프라·선수층 확장·테니스 산업화
현재 한국 테니스의 핵심 과제는 지속 가능한 엘리트 육성 시스템의 확립이다.
유소년 선수의 기량 격차 해소, 전문 코칭 인력 확보, 과학기술 기반 훈련 체계 설계 등이 주요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며, 지역 테니스센터의 확대와 공공 인프라 확충도 매우 중요한 과제로 평가된다.
한편 테니스 인구 증가에 따라 생활체육과 전문체육의 연계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글로벌 스포츠 산업은 이미 데이터 분석·스마트 장비·AI 코칭 도구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어, 한국 테니스 역시 이러한 기술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국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형택-정현-권순우로 이어진 성과는 단발 이벤트가 아니라 한국 테니스 시스템이 고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며, 앞으로는 더 많은 선수들이 세계 투어에 진출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한국 테니스는 이제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라, 아시아 테니스 발전을 선도하는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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